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 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집 제목, 시 제목 한번 제대로 만났네요.
아름다운 시.
유예되는, 스스로 유예시키는 이런 부채감이 시인의 운명.
막힌 하수도 뚫어준 수고한 영진설비에 왜 노임 4만원을 안 갖다 주겠어요.
다만 시인은 쑥국새 소리 같은 빗소리,
향기 나는 재스민 나무와 시 살림 놀이를 좀 더 하고 싶었던 것.
영진설비에 '향기 나는 나무' 같은 시를 구워
노임에 더 얹어주려 한 것일지도 모를 일.
그러나 현실은 산문적으로 닥치는 것이어서 그것이 시인의 비애.
(이진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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