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공간

사직서 쓰는 아침

꿈낭구 2010. 10. 18. 17:17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 먹히기 싫은 심정으로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사직서는 공자도 퇴계도 쓴다.

퇴계는 아예 호에 물러날 퇴(退)자를 붙여 관직에 있던 21년간

무려 53회에 걸쳐 사직원을 냈다.

공손한 어조 속에 칼을 감춘 시인의 사직서는 어쩐지 통쾌하다.

머슴살이와 뒤통수를 치는 비루한 세상에 대한 야유는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의 가슴까지 다 후련하게 하는 면모가 있다.

비애를 비트는 반어적 어조는 몇 날 며칠 구겼다 펴길 거듭했을

번민의 시간을 애써 가려준다.

그러나, 그 후련함과 안간힘의 기교가 비애감을 한층 더 돋을새김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직서를 쓰고 싶은 아침마다 대신 꺼재 읽으며

격해진 가슴을 진정시켜 주던 시다.                     (손택수.시인)

'시와 함께하는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굴욕에 대해 묻다  (0) 2010.12.30
바이올린 켜는 여자  (0) 2010.12.30
히말라야시다 구함  (0) 2010.10.18
감나무  (0) 2010.10.01
대추 한 알 -장석주-  (0) 201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