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공간 75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로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 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에게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을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봄 바람난 년들

봄 바람난 년들 / 권나현 보소! 자네들 들었는가? 기어이 아랫말 매화년이 바람이 났다네 고추당초 보다 매운 겨우살이를 잘 견딘다 싶더만 남녘에서 온 수상한 바람넘이 귓가에 속닥댕께 안 넘어갈 재주가 있당가? 아이고~ 말도마소! 어디 매화년 뿐이것소 봄에 피는 꽃년들은 모조리 궁딩이를 들썩 대는디 아랫말은 난리가 났당께요 키만 삐쩍 큰 목련부터 대그빡 피도 안 마른 제비꽃 년들 까정 난리도 아녀라 워매 워매~ 쩌그 진달래 년 주딩이 좀보소? 뻘겋게 루즈까정 칠했네 워째야 쓰까이~ 참말로 수상한 시절이여 여그 저그 온 천지가 난리도 아니구만 그려~ 어쩔 수 없제 잡는다고 되겄어 말린다고 되겄어 암만 고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안 혀라 보소 시방,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랑께 바람난 꽃년들 밴질밴질 한 낮짝 이라..

봄길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 있다

이사

이사 / 서수찬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장판지를 들추어내자 만 원 한 장이 나왔다 어떤 엉덩이들이 깔고 앉았을 돈인지는 모르지만 아내에겐 잠깐 동안 위안이 되었다 조그만 위안으로 생소한 집 전체가 살 만한 집이 되었다 우리 가족도 웬만큼 살다가 다음 가족을 위해 조그만 위안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 숟가락 하나라도 빠트리는 것 없이 잘 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 걸 알았다 아내는 목련나무에 긁힌 장롱에서 목련향이 난다고 할 때 처럼 웃었다 * 장판 아래 숨겨놓은 비상금을 깜박 잊은 채 이사를 간 가계가 있었나 보다. 그들의 망각이 새로 들어온 가계의 심란한 주름살을 활짝 펴주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만 원 한 장의 이 소박한 횡재가 아름다운 것은 다음 가족을 위한 위안거리를 준비하는 부부의 따뜻한 마..

건망증 1

건망증 1 /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끼일 위인도 못 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중략)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당신과 참 비슷하다고요? 글쎄, 오늘 아침엔 23층을 다시 올라가셨다고요? 그러나 이 시의 미덕은 현실을 현실대로 쓰는 진정성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정성은 보다 큰 진정성 속으로 달려갑니다. 마지막 행 ..

나이가 드니

나이가 드니 / 박노해 나이가 드니 눈이 어두워진다 마음눈이 더 맑고 깊어지라고 나이가 든 걸음이 느려진다 진중한 걸음으로 균형을 잃지 말라고 나이가 드니 몸이 말라 가벼워진다 말을 줄여 삶의 무게를 더 실으라고 나이가 드니 자꾸만 고개가 숙여지는데 내 안에 밟힌 자들의 분노가 머리를 쳐든다 ********************************************** 오늘 나이 한 살을 보태며 가만히 읊조려 봅니다. 나이값이 부끄럽지 않은 한 해로 살아보기로 다짐을 해봅니다.

12월

12월 / 정연복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뒷맛이 개운해야 참으로 맛있는 음식이다 뒤끝이 깨끗한 만남은 오래 오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두툼했던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걸려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보석같이 소중히 아끼자 이미 흘러간 시간에 아무런 미련 두지 말고 올해의 깔끔한 마무리에 최선을 다하자 시작이 반이듯이 끝도 반이다

12월의 기도

12월의 기도 / 윤영초 ​ 마지막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시간 저 멀리 지나가 버린 기억 차곡차곡 쌓아 튼튼한 나이테를 만들게 하십시오 ​ ​ 한해를 보내며 후회가 더 많이 있을 테지만 우리는 다가올 시간이 희망으로 있기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십시오 ​ ​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 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하게 하십시오 욕심을 채우려 발버둥쳤던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며 ​ ​ 잘못을 아는 시간이 너무 늦어 아픔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 ​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우리 가슴마다 웃음 가득하게 하시고 허황된 꿈을 접어 겸허한 우리가 되게 하십시오 ​ ​ 맑은 눈을 가지고 새해에 세운 계획을 헛되게 보내지 않게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

혼잣말

혼잣말 / 오탁번 수수밭가에서 팔 휘저으며 새 떼 쫓는 할아버지나 보행기 밀고 가다가 느티나무 그늘에 쉬는 할머니는 중얼중얼 혼잣말 잘도 하신다 그 말을 가만히 귀동냥해서 들으면 그게 바로 시다 그러나 문장으로 옮겨 적으려는 순간 는개처럼 흩어져 버린다 마른기침 사이로 쉬는 한숨에는 전 생애의 함성이 있고 캄캄한 우주를 무섭게 가로지르는 살별의 침묵도 있다 중얼중얼 혼잣말이여 아 알짜 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