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3.10.22
불혹 불혹 - 김세완 -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갈 것. 꽃·나무·바다·하늘·애인·햇살 같은 희망적인 어휘는 버리고, 침묵·허무·술잔·절망·이별·권태 같은 쓸쓸한 어휘에 익숙해질 것. 어깨는 바로 펴고 시선은 전방을 향한 채 걸을 것. 닳은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3.04.11
다섯 살 다섯 살 - 서정주 - 소는 다섯 살이면 새끼도 많고, 까치는 다섯 살이면 손자도 많다. 옛날 옛적 사람들은 다섯 살이면 논어도 곧잘 배웠다 한다. 우리도 다섯 살이나 나이를 자셨으면 엄마는 애기나 보라고 하고 ㄱㄴ이라도 부즈런이 배워야지 그것도 못하면 증말 챙피다. * 미당의 시를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3.04.04
어머니의 우물 어머니의 우물 - 김유선 - 어머니는 가운데 물이 좋은 거라며 바가지 휘휘 저어 탐방, 한가운데 물만 뜨셨다 바가지 바닥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닦고 탐방탐방 중심으로만 바가지를 넣어 좋은 물만 길었다 나도, 중심으로 가고 싶다 허리를 굽히면, 중심은 너무 멀고 내 팔은 너무 짧다 살펴..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3.02.02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곽효환 - 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12.26
사십대에 내리는 눈 사십대에 내리는 눈 / 오인태 저게 다 쌀이라면 좋겠다 싶었던 때가 있었어요 저들이 모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군중들이라면 얼마나 든든하랴 싶었던 때도 있었지요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구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도 참 푸근하게 덮어와 세상의 위안이 되는 저 눈송이처럼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12.23
밥과 쓰레기 밥과 쓰레기 - 이대흠 - 날 지난 우유를 보며 머뭇거리는 어머니에게 버려부씨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과자를 모으면서 멤생이 갖다줘사 쓰겄다 갈치 살 좀 봐라, 갱아지 있으먼 잘 묵겄다 우유는 디아지 줬으먼 쓰것다마는 신 짐치들은 모태갖고 뙤작뙤작 지져사 쓰겄다..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12.20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 <풀꽃> 바람결에 달콤한 향내가 거실로 발꿈치를 들고 몰래 몰래 들어오는것을 보았다.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 주인이 없어도 용케 잘도 견디어 낸게 놀라웠다. 이렇게 목을 길게 빼고서 꽃대를 피워 올리도록 눈..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09.08
담쟁이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07.23
대숲에 서면 대숲에 서면 - 정지원 - 사는 일이 꿈을 찢기고 지우는 길이었다면 서슴없이 겨울 대숲으로 오라 시퍼런 댓잎 사이로 불어오는 짱짱한 칼바람이 꽛꽛하게 언 몸뚱이를 후려치거든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라 연하고 부드럽게 올라오는 희망으로 제 속의 더러..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