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대하여 꽃에 대하여 - 배창환 - 열살 때 나는 너를 꺾어 들로 산으로 벌아 벌아 똥쳐라 부르면서 신이 났다. 그때 나는 어린 산적이었다. 내 나이 스물에 꽃밭에서 댕댕 터져오르는 너는 죽도록 슬프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 마흔 고개 불혹이 되어서도 나..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11.16
참 우습다 참 우습다 - 최승자 -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걸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10.29
침묵 침묵 - 백무산 - 나무를 보고 말을 건네지 마라 바람을 만나거든 말을 붙이지 마라 산을 만나거든 중얼거려서도 안된다 물을 만나더라도 입다물고 있으라 그들이 먼저 속삭여올 때까지 이름 없는 들꽃에 이름을 붙이지 마라 조용한 풀밭을 이름 불러 깨우지 마라 이름 모를 나비에게 이름 달지 마라 그..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10.07
아내의 잠 아내의 잠 - 마종기 - 한밤에 문득 잠 깨어 옆에 누운 이십 년 동안의 아내 작게 우는 잠꼬대를 듣는다. 간간이 신음 소리도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세상이 더 잘 보인다. 멀리서 들으면 우리들 사는 소리가 결국 모두 신음 소리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것, 그것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10.01
한 호흡 한 호흡 - 문태준 -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9.06
방귀 방귀 - 최서림 - 내 몸 안에서 하늘과 땅이 드디어 서로 통하는 소리 꽉 막힌 구멍이 시원하게 뚫리는 소리 생명의 폭죽이 터지는 소리, 소리 *가죽피리가 아니라 가죽대포다. 몰래 군중 사이로 고개 내미는 첩자가 아니라 씩씩하게 행진곡풍으로 질러가는 일개 대대다. 천지가 통했으니 내 몸이 한 옥..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8.29
처서 처서 -정끝별- 천변 오동가지에 맞댄 두 꽁무니를 포갠 두 날개로 가리고 사랑을 나누는 저녁 매미 단 하루 단 한 사람 단 한 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제 노래에 제 귀가 타들어가며 벗은 옷자락을 걸어놓은 팔월도 저문 그믐 멀리 북북서진의 천둥소리 *귀뚜리 울음소리 깊어지고 모기는 입이 비뚤어졌..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8.23
넙치의 시 넙치의 시 -김신용- 거대한 바다의 무게에 짓눌려 납작해져 버린, 이제 얕은 물에 담가놓아도 부풀어오를 줄 모르는 넙치여, 억눌리고 억눌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내장을 삼키고 삼켜, 그만 뒤통수까지 밀려난 눈으로 넙치여,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한의 무늬처럼 심해의 밑바닥에 뱃가죽을 붙인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8.14
그늘 학습 어느새 밤송이가 이렇게 굵어졌네여. 뾰족뾰족헌 가시를 내어밀고 모처럼 반짝~나온 햇님과 눈싸움을 하고 있쓰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감나무는 담 너머로 길게 길게 손을 뻗고 두 귀를 쫑긋하고 엿듣고 있네여. 조심하셔라... 이 감나무 바람 부는 날이면 근지러워 죄다 떠벌일지..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8.13
리필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필' -이상국- 리필이라니? 커피가 .. 시와 함께하는 공간 2011.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