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공간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꿈낭구 2012. 12. 26. 11:10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곽효환 -

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자욱한 엉성한 진열품 너머 회벽에 걸린

낡은 흑판

동네 사람들 살림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로 쓴 외상 장부

곽병호······

곽효환/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목장갑 네 켤레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운

깨알 같은 글씨 가득한 한 뼘들이 전화번호부에도 인명록에도

꼭 하나뿐이던 내 이름.

수십 가구 작은 마을에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으로 존재하네

 

그것이 허세 없는 내 이름값이려니

 

* 외부의 사물을 통해서 내 삶의 면목을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다.

내어다보는 것, 그것이 곧 들여다보는 것이 되는.

스무 살 무렵, 내게 그것은 개펄이었다.

변산반도 어름의 국도를 군내버스를 타고 가다 본 바다 쪽,

썰물이 수평선까지 물러간 거기,

삶의 면목이 누워 있었다.

그건 바다나 개펄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 낯선 것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을 때

재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은 것 같은 기분,

그 인상은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곽효환 시인은 "두 장 막걸리 세 병/······ 목장갑 네 켤레"라고 적힌 외상 장부에서

그것을 경험했을까?

그것이 '허세 없는 이름값'이라지만,

우리가 허세를 부려봐야 얼마나 부렸겠는가.

이 시 속의 곽효환은, 아무래도,

광화문의 어느 건물에서 월급쟁이 노릇 하는 내 친구

곽효환하고 똑 닮았다.     <장철문·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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