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공간

건망증 1

꿈낭구 2022. 3. 2. 11:38

건망증 1 /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끼일 위인도 못 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중략)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당신과 참 비슷하다고요?
글쎄, 오늘 아침엔 23층을 다시 올라가셨다고요?
그러나 이 시의 미덕은 현실을 현실대로 쓰는
진정성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정성은 보다 큰 진정성 속으로 달려갑니다.
마지막 행 '깜박깜박 그대가 보고 싶다'는
시구 속으로.
이 탓에 이 시는 보고 싶지만 보지 못하게 하는
이 시대의 모든 것들에게 보내는 비가(悲歌)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강은교·시인)*

'시와 함께하는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길  (0) 2022.04.08
이사  (0) 2022.03.19
나이가 드니  (0) 2021.12.23
12월  (0) 2021.12.23
12월의 기도  (0) 202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