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
- 김세완 -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갈 것.
꽃·나무·바다·하늘·애인·햇살 같은 희망적인 어휘는 버리고,
침묵·허무·술잔·절망·이별·권태 같은 쓸쓸한 어휘에 익숙해질 것.
어깨는 바로 펴고 시선은 전방을 향한 채 걸을 것.
닳은 구두 뒤축을 탓하지 말고,
한 벌뿐인 양복을 탓하지 말고,
양심을 탓하지 말고,
빈 주머니를 탓하지 말고 가급적 큰 소리로 웃을 것.
그러다가 불면에 잠 못 이루고
남몰래 술잔을 기울이는 밤이면
그때는 뒤를 돌아다볼 것.
* 시간이 느리게 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른이 되고 싶은데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데
더디게 더디게만 가던 시간이
어느새 흘러서 그 나이를 훌쩍 지났다.
내가 스물일곱에 김세완 시인을 처름 만났으니
좀처럼 말이 없던 그가 꼭 불혹 언저리를 지나고 있었을 때다.
마음이 흐려서 무엇에 홀리기 쉽다는 그 나이를 향해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희망적인 어휘는 버리고 쓸쓸한 어휘에 익숙해지라고.
미굴하게 살지 말고 어깨를 펴고
비루한 현실을 탓하지 말고 가급적 큰 소리로 웃으라고.
그래도 잠 못 이루고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가 있거든
그때 비로소 손을 내밀라고.
소박하고 쓸쓸한 자기 암시,
그 시절 지나오느라 힘들었을 게다.
오늘밤, 미혹되지 않으려고 불혹과 씨름하는 이들과
그 나이를 지나온 사람들과 둘러앉아
큰 소리로 웃으며 술 한잔 나누어야겠다. <곽효환·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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