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공간

여백

꿈낭구 2013. 11. 29. 12:20

 

 

 

 

여백

 

                             - 도종환 -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학교 다닐 때 가장 오금을 저리게 한 게 뭐였는고 하니

미술이었습니다.

흰 도화지였습니다.

색색의 물감이었습니다.

뒷짐 지고 왔다 갔다 그러면서 어디 얼마나 그렸나 좀 볼까 하고 검사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릴라치면 세계가 쌀알이었고,

그림을 안 그릴라치면 세계가 우주였습니다.

그리겠다는 강박,

채우겠다는 강박 때문에 물감범벅인 그림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숨을 터줄 흰 손 같은,

한 줄 여백의 여지를 눈치껏 알아챘다면 상상력과 창의력쯤이야

비싼 돈 주고 안 배워도 되었으련만

그게 참 힘든 노릇이라 엄마들 쌈짓돈 풀어가며

 애들 별별 과외에 등뼈 휘는줄 모르는가 봅니다.

진짜 사람스러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좀 둘러보렵니다.

그리고 곁이 되는 이들에게 틈을 내볼 요량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깃든다면, 깃들게 할 수 있다면

양팔 위로 새똥 폭폭 쌓인들 무슨 대수겠어요.

모두 모여 숲이 되자고요.

풍요로운 숲으로 우리 서로에게 산소방울로 터져 보자고요.    <김민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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