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곽효환 -
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자욱한 엉성한 진열품 너머 회벽에 걸린
낡은 흑판
동네 사람들 살림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로 쓴 외상 장부
곽병호······
곽효환/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목장갑 네 켤레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운
깨알 같은 글씨 가득한 한 뼘들이 전화번호부에도 인명록에도
꼭 하나뿐이던 내 이름.
수십 가구 작은 마을에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으로 존재하네
그것이 허세 없는 내 이름값이려니
* 외부의 사물을 통해서 내 삶의 면목을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다.
내어다보는 것, 그것이 곧 들여다보는 것이 되는.
스무 살 무렵, 내게 그것은 개펄이었다.
변산반도 어름의 국도를 군내버스를 타고 가다 본 바다 쪽,
썰물이 수평선까지 물러간 거기,
삶의 면목이 누워 있었다.
그건 바다나 개펄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 낯선 것에서 낯익은 것을 발견했을 때
재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은 것 같은 기분,
그 인상은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곽효환 시인은 "두 장 막걸리 세 병/······ 목장갑 네 켤레"라고 적힌 외상 장부에서
그것을 경험했을까?
그것이 '허세 없는 이름값'이라지만,
우리가 허세를 부려봐야 얼마나 부렸겠는가.
이 시 속의 곽효환은, 아무래도,
광화문의 어느 건물에서 월급쟁이 노릇 하는 내 친구
곽효환하고 똑 닮았다. <장철문·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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